지혜는 어디에 깃들어 있습니까? 제따와나 선우 여러분 잘 지내셨나요? 법에 대한 바른사유를 하기에 좋은 가을입니다. 선원에서는 반야심경에 대한 법문이 몇 차례 이어졌습니다. 연기를 이해하면 공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밀린다왕문경에 나오는 연기에 대한 비유를 나누어봅니다. 왕이 묻습니다.
“지혜는 어디에 깃들어 있습니까?”
“대왕이여, 어디에도 깃들어 있지않습니다.”
“존자여, 그러면 지혜는 없습니까?”
“대왕이여, 바람은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존자여, 아무데도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바람은 없습니까?”
“잘 알겠습니다.” | 수요법회 | 초기불교와 반야심경 3 연기를 이해함으로써 공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불교를 이해할 때 공을 너무 전면에 내세워 접근하기 보다는 연기를 핵심 키워드로 해서 연기로부터 무상, 고, 무아로 접근하면 혼란이 없다. 처음부터 너무 공으로 접근하면 오해의 소지가 많다. 산스크리트 원문에서 ‘공’은 원래 ‘자성 공’이었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고유의 성질, 즉 자성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현재에 임시로 있느냐 없느냐는 관점에서 보면 있지만 영원히 변치 않는 실체가 있냐고 하면 없다는 것이다. 중도를 이해함으로써 공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불생불멸. 고유성질을 가진 법이 생(生)했다가 그것이 멸(滅)하는 것이 아니다. 불구부정. 화는 더럽고 지혜는 깨끗하다고 하는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다. 조건에 의해 해로운 현상, 유익한 현상이 드러난 것일 뿐이다. 부증불감. ‘지혜가 늘었다.’, ‘번뇌가 줄었다.’ 이런 현상은 있지만 임시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지 본질적으로 보면 고유성질을 가진 실체가 늘거나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법문의 일부를 정리한 글입니다. 💬 반조일기4 | 정선스님의 반조일기 중 일부입니다.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인가? 병에 걸리고 무기력 해졌습니다.
최근에 암 수술하고 항암치료를 받았습니다. 아픈데 혼자 지내야할 때는 고립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어느 순간 더 이상 고통을 견디기 어려웠고 모든 의욕이 다 사라졌습니다.
모든 일이 지겹고, 사는 게 싫고 무얼 하든 의미가 없고 가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괴로움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는 생각, ‘이런 걸 해서 뭐하나. 가르침은 좋은 조건에 있을 때나 통하는 좋은 말씀일 뿐이다.’ 라는 거부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의도적으로 의욕을 일으켜 반조 했습니다.
괴로움도 있었지만 괴로움 때문에 법에 대한 절실함도 일어났습니다. 그동안 법문을 들은 조건으로 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기억해내고 내가 겪는 일들을 법으로 반조 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의욕은 전혀 없었지만 의도적으로 의욕을 일으켜서 힘을 짜내어 반조를 해 보았습니다.
먼저 정신 현상을 법으로 환원했습니다. ‘이것은 절망이다. 이것 또한 화의 한 형태로 드러난 해로운 현상이다. ‘화’이기 때문에 괴로운 느낌이 일어난다.‘ 법으로 환원하니까 화와 자신을 동일 시 하는 것에서 벗어나 일단은 멈추었습니다.
정말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인가?
‘과거에도 좌절 했고 지금도 좌절하고 있으니까 나는 좌절하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에 휘둘리지 말고 반조 해 보자고 다짐했습니다.
‘마치 여러 조건 때문에 번개 라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과 같이 좌절이라는 ‘화’도 여러 조건에 의해 빚어진 현상일 뿐 단독으로 어떤 성질을 가지고 존재하는 실체는 없다. 조건이 소멸하면 번개가 사라지듯이 ‘화’라는 현상도 조건이 소멸하면 사라질 것이다.‘라고 반조 했습니다.
과거에 일어난 법이 현재에 다시 나타났다고 습관적으로 생각할 뿐이지 사실은 과거와 현재의 법이 똑같은 것이 아니라고 이해되었습니다. 좌절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내 것도 아니고 나는 좌절하는 사람도 아니다. 단지 좌절을 일으키는 조건을 반조하고 좌절에서 벗어나자는 의욕이 생겼습니다.
무상한 것은 불만족스럽고 무아라고 반조 했습니다.
예전에는 나도 큰 병에 걸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병에 걸리고 나니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이 생각을 거머쥐고 죽음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일어났고 그 욕망 때문에 화가 일어나고 반복되면서 좌절하게 되었습니다. 조건이 변하면 누구나 병들 수 있다는 현실을 진리로 수용하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이었습니다.
‘현실이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고 해서 진리가 아닌 것은 아니구나. 오히려 불만족이 진리구나. 세상 모든 것은 조건 따라 형성된 것이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구나.’ 이렇게 반조 한 후에 마음은 안정되고 평온 해졌습니다.
법을 따라 가는 길은 안전하다고 느꼈습니다.
법을 따라 가는 길은 쉽지 않지만 안전하다고 느꼈습니다. 조건에 따라 형성된 것은 무상하고 불만족스러운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무아 라는 진리를 한 번이라도 받아들이고 나니 이것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진심을 담아 예경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훌륭해 보이는 다른 사람의 수행을 흉내 내내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수행을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수행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 반조를 돕는 경전구절4 세상은 있다? 세상은 없다? “깟짜야나여, 이 세상은 대부분 두 가지를 의지하고 있나니 그것은 있다는 관념과 없다는 관념이다. 깟짜야나여, 이 세상의 일어남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에게는 세상에 대해 없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깟짜야나여, 세상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에게는 세상에 대해 있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깟짜야나여, ‘모든 것은 있다.’는 이것은 하나의 극단이고 ‘모든 것은 없다.’는 이것이 두 번째 극단이다. 깟짜야나여, 이러한 양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중간에 의해서 여래는 법을 설한다.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들이, 의도적 행위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가 발생한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기 때문에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고,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기 떄문에 알음알이가 소멸하고,…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가 소멸한다.” 깟짜나곳따 경 (S12:15)의 일부입니다. 이 경은 초기불전연구원에서 번역한 것입니다. 💬 선원 풍경 🌷 주간별 공양및 기타 보시 제따와나선원 뉴스레터 322호 모든 존재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따와나선원 강원도 춘천시 남면 윗박암길53 t: 033-262-48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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