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354

 이 세상의 모든 정신적 물질적 현상은 조건 지어져 있다는 연기에 대한 이해와 체득이 부족하면 타인에게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자주 설명하게 됩니다. 세상의 크고 작은 업적 속에 내 지분이 얼마나 포함되어 있는지 데이터화해서 안으로나 밖으로 자신이 공고히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받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번거롭긴 해도 저를 포함한 존재에 대한 취착이 있는 대부분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지요. 존재들이 조건을 의지하여 형성되어 있다는 법문을 듣기는 하지만, 타인과 부딪혔을 때 누가 우위를 점하고 있는지 비교해 보거나 자신이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갈애는 조건을 의지하고 조건 지어진 법에 대한 지혜를 상회하곤 합니다. 특히 수행의 영역에서 물리적으로 보이지 않는 지혜에 대한 집착은 쉽게 불안으로 번져 내가 어떤 수행력을 가진 사람인지 증명할 만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을 자극할 때가 많습니다.

스님의 모습을 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구질구질하게 설명하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자각하게 된 순간 절망감을 느낍니다.

이내 다시 구질구질함을 내려놓습니다.

절망도 사라집니다.

봄입니다. 차가운 공기 사이로 따뜻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따뜻한 봄바람을 맞고 있으면 마음속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따뜻한 바람이 피부에 닿는 순간 좋은 느낌이 일어나고, 포근하고 기분 좋은 온기를 즐기는 마음에서 10년 전 대학교에 다닐 무렵의 웃고 떠들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이내 미화된 옛 기억들이 다시 즐거움을 느끼고 싶은 갈애를 부추깁니다. 그리고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하지 않았을 후회스러운 일들에 대한 생각도 합니다. 즐거웠던 기억이라든지 후회스러운 기억이 지금껏 변하지 않은 것처럼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오래돼서 정확하지도 않은 옛 기억이 지나치게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느껴진 까닭은 방금 일어난 따끈따끈한 갈애가 흐릿한 기억의 껍데기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피부로 느껴지는 바람의 온기나 감촉은 스무 살이나 스물한 살 무렵에 경험한 봄날의 조건과 아주 비슷해서 조금이라도 옛 기억을 떠올리면서 즐거워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컸습니다.

의도적이건 우발적이건 과거 행위의 의도나 결과는 현재와 미래에 영향을 줍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뒤섞인 과거를 조건으로, 현재와 예상되는 미래를 통틀어 '나'라고 착각할 정도니 그 영향력은 상상 이상입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또 미래에 일어날 일들은 다양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조건 지어져 있기 때문에 과거의 한 사건으로 인해 미래가 기계적으로 결정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과거부터 반복적인 행위나 의도가 있었다면 현재 일어나는 문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굳어진 행동의 경향성을 '나'라고 정의할 수 없지만 과거 조건을 잘 살피고 현재를 관찰한다면 지금까지 어떤 행동 패턴을 가지고 오류를 범해왔는지 합리적으로 유추해 볼 수 있겠지요.

봄바람에 마음이 10년 전을 떠올리는 것을 잘 살펴보면 여전히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지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여전히 풋풋한 젊음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고 다른 원인은 과거에 실수했던 일들을 바로잡아 무결점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실수를 만회하고 세속적인 완전무결한 삶을 살고 싶어서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합니다. 이런 생각들은 열반을 목표로 하여 노력하기보다는 여전히 좀 더 세속적으로 나은 사람이 되는 수준에 안주하려고 하거나 내가 추구해왔던 힙스터 같은 삶을 살고 싶어 하는 현재의 갈애에서 드러납니다. 사람도, 일도, 모든 것이 내 통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실패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고, 불교를 접하면서 변하기 마련인 것들을 집착하는 마음에서 괴로움이 발생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후 출가해서 수행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내 뜻대로 통제할 수 있을거라는 어리석음을 무상하다는 지혜로 완전히 치환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마음 한편에는 즐거운 느낌을 더 많이 느끼고 괴로운 느낌은 도려내고 싶어 합니다.

아쉬움, 그러니까 후회나 즐거운 느낌을 즐기는 행위는 수행시간뿐만 아니라 일상의 영역까지 침범해 올 때가 많습니다. 후회나 갈애는 멈추려는 생각으로 놓아지지 않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흘러도 집착하는 대상을 실제로 내려놓기 전까지는 현실에서 쳇바퀴를 돌 수밖에 없습니다. 쳇바퀴를 내려오기 위해서 조건 지어진 법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고 무엇을 어떻게 내려놓을지 행동으로 옮겨봅니다.

그 시작은 내가 집착하는 고리를 하나라도 끊어보는 데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조건 지어진 법을 정확히 통찰하려면 탐욕과 성냄 같은 장애 요소들이 멈춘 상태인 바른 삼매가 있어야 하지만 지금 바른 삼매가 없기 때문에 일상에서 할 수 있는 감각기관 단속을 점검해봅니다. 우선 틀어둔 노래를 껐습니다. 내가 향유하고 싶은 분위기나 컨셉에 대한 생각을 의도적으로 멈춰봅니다. 그것 외에도 올 초에 동안거가 끝나고 사용하는 책상과 탁상용 스탠드를 제외하고 내가 좋아하던 대부분의 물건을 정리한 것도 그런 노력에 들어가겠지요. 감각기관 단속만 하더라도 마음이 차분해집니다. 마음이 차분해지고 나니 자극적인 일이나 생각으로 유보해둔 피로가 밀려옵니다.

피로함을 미뤄가면서까지 자극적인 생각을 하는 원인을 반조해 봅니다. 첫 번째로 자극적인 생각이 주는 즐거운 느낌이 좋고 그 느낌을 더 얻기 위해 생각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차분하고 가라앉는 상태가 지속될 때면 내가 잘하고, 좋아하면서 '나'라고 여기는 색깔이 빛바래고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단조로운 일상의 반복이나 마음이 차분한 상태를 반사적으로 거부해 왔고, 거부감을 드러내는 여러 가지 형태 중 하나가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라고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당장의 공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인정하고 직면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을 직면한다고 거창하게 표현했지만, 이는 사소한 일상의 절제와 단속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절제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면 그 행위는 평온함과 적게 가지는 미덕에서 그치겠지만 절제를 조건으로 평온한 결과가 도출되는 연기적 관계성을 잊지 않고 행동할 수 있다면 평온함을 얻는 것 이상으로 이익이 있을 거라 믿습니다. 조건 지어져 있음을 기억하고, '나'라고 집착하는 색깔을 지워가는 과정은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는 방향이고, 집착하지 않으면 괴로울 만한 일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전에 법문 듣고 수행한 조건이, 잘못된 견해나 대상에 집착하는 마음에 반응하여 반조할 기회가 생긴 것처럼 별것 아닌 일 같아도 지금 이 순간도 과거의 조건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가볍게 넘어갈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때문에 선법의 조건이 아주 작더라도, 끊임없이 이어지길 바랍니다. 불선법의 조건은 끊임없이 관찰하고 멈추도록 노력합니다.

제따와나를 청정하게  

3월 29일 - 4월 4일 보시  회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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