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한 것은 무엇이건 이뤄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과거형으로 말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후져 보이기 싫은 마음이 많습니다.
과거에는 더 적극적으로 내가 원하는 삶을 선택하고 살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대단히 좋은 수준이 아니어도 내가 생각하는 가족, 내가 원하는 직업, 적당한 집과 차 등 내가 원하고 계획하는 삶이 있었고, 불확실함 속에서 내가 가진 것들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내가 계획한 삶의 수준 아래로 떨어지는 상황에 대한 공포가 있었습니다.
공포가 있다 보니 계획과는 다른 결정을 할 때면 변명 같은 설명이 길어졌습니다. 그 설명이나 이유를 찾는데 꽤 많은 시간을 쏟곤 했습니다. 특히나 어떻게 절에 와서 살게 되었는지 누군가 물어볼 때면 많은 이유가 필요했습니다. 어쩌면 누군가 연애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와 같이 살다 보니 불교를 접하게 되었는데 좋아서 자연스럽게 출가를 결정했다고 담백하게 말 할 수도 있는 것을 많은 이유와 당위성, 그리고 특별함으로 포장했습니다. 포장한 이유는 출가 직전에 준비하던 시험을 포기하면서 실패감과 마음의 상처 때문이었습니다. 그 상처를 가리기 위해서 수행자로서의 삶의 각오를 좀 더 비장하게, 세속의 일은 신포도 취급하면서 마치 처음부터 출가할 운명인 사람인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결과의 원인을 찾는 것은 불교 수행에서 중요한 과정이지만 어쩌면 지나치게 원인을 파헤치는 행위가 지금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독이 되기도 한다는 생각을 최근에서야 하게 되었습니다. 지혜와 어리석음이 섞인 상태에서 하는 사량분별과 사량분별의 결과를 사실이라고 철석같이 믿으면서 스스로를 지혜롭고 숭고한 수행자로 착각하게 만드는 과정은 불교 수행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전 그렇게 속았지만요.
이런 과정은 어리석음과 탐욕과 성냄의 흔한 메커니즘인데,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내가 생각한 대로 목표치가 다 이뤄져야 할 이유는 하등 없습니다. 조건에 따라 그렇게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는 일을 되어야 하는 일로 정해두었기 때문에 재가자로 살면서, 그리고 출가하고서도 불안과 공포 속에서 떨어야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하는 선법에 대해 기뻐할 줄 알고, 지금 수준에서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 생각하고 부족한 점을 반성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고, 왜 왔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구질구질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또, 지금 당장 내가 어떤 사람이어야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받아들이기로 한 (숭고하게 여겨온) 초심을 돌아보면 대부분의 어리석음과 불만족, 아주 작은 지혜와 신심이었습니다. 첫사랑에 대한 왜곡된 기억 같은 출가의 동기와, 그에 얽힌 자잘한 이야기들이 지금 정말 중요한지 생각해 보면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단지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는 조건이 되어준 것으로 그 기능과 의미를 다 했습니다. 여전히 왜 절에 왔냐는 질문에 과거의 상처가 트라우마로 떠오르곤 합니다. 상처가 아물수록 시험에 떨어진 실패감과 상처가 있었고, 그제야 부처님 가르침이 눈에 들어왔다는 말을 더 편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을 감추기 위한 출가의 이유가 점점 중요해지지 않고 있습니다.